신정주(申鼎周)[1764~1827]는3~4세에글을 해독하기 시작해 7~8세에 『통감(通鑑)』, 10세에 『소학(小學)』과 사서(四書), 12세에삼경(三經)을 읽었다.1779년(정조 3) 옥련사(玉蓮寺)에서 공부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족부(族父) 신체인(申體仁)에게 수학하고,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서도공부하였다.
1783년 향시(鄕試)에급제하고, 이어 1809년(순조 9)에는 영남의 명망 있는 여러 학자들과 더불어, 홍여하(洪汝河)가 편찬한 『휘찬려사(彙纂麗史)』 교정 작업에 참여하였으며, 구미[지금의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로 거처를 옮겼다. 이어 1812년 『구장지(龜庄誌)』와「구미촌 향약(龜尾村 鄕約)」을지어 주민 교화(敎化)에 힘썼다.
1817년 대구의 팔공산(八公山)에 가서평산 신씨(平山 申氏)와 아주 신씨가 분파되는 사적(事蹟)을 고찰하였다. 이후호서(湖西) 지방을 두루 유람하며, 여러시와 글을 남겼다고 한다. 만년까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오로지 학문 연구와 향약 실시 같은 향촌 교화에주력하여 ‘학행(學行)’으로고을에서이름을 높였다.
학문과저술
문장에 능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만록(漫錄)」, 「호서 기행록(湖西紀行錄)」 등이 6권 3책의문집 『도와집(道窩集)』에 전한다. 문집에수록되어 있는 「자경육잠(自警六箴)」과 「암실명(暗室銘)」을지어 자신의 경계로 삼았으며 『구장지(龜莊誌)』는 지금까지 아주 신씨가 세거하고 있는 구장(龜莊)[현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의 지리지이다.
내용
조선 후기의 학자 신정주(申鼎周)의 시문집. 6권 3책. 목판본. 1863년(철종 14) 그의 제자 신조헌(申祖憲)과 족부(族父) 휴인(休仁) 등에 의해 간행되었다. 서문은없고권말에 홍우정(洪宇正)·이정우(李廷佑)의 제발(題跋)이 있다.
권1에 시, 권2·3에 서·제문, 권4에 애사·자사(字辭)·유사·행록, 권5에 잠(箴)·명(銘)·서(序)·기·지발(識跋)·상량문·묘표, 권6은 잡저와 부록으로행장·만사·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주로 제영(題詠)·영물(詠物)·수연운(晬宴韻)·만사등이고, 서(書)는사사로운 문안편지보다는학문에 관한 문답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경전(經傳)의 훈의(訓義)에 대해많은논답(論答)이 있다.
잡저 가운데 〈용학도후서庸學圖後序〉는대개 이기(理氣)에 관한 논변으로, 그 이론이 명쾌해 경학(經學)을연구하는데 훌륭한 자료가 된다.
잠 가운데 〈자경육잠自警六箴〉과명 중의 〈암실명 暗室銘〉 등은 자신의 나태함을 경계하고 마음을 전일(專一)하게 가지는 데 대한 잠계(箴戒)로서후인들의규범이 되는 명언들이며, 저자의 조행(操行)과 수양 정도를 엿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유해정록 遊海亭錄〉·〈유청량산록 遊淸凉山錄〉 등의 기행록은 관람한 주위의 경관을 운치 있게 묘사함으로써 문장이 훌륭하다는 평을 들었는데, 초년에 사장(詞章)에힘쓰다가늦게 성리학자인 정종로의 문하에서 이학(理學)을공부한 저자의문장과 사상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장서각도서에 있다